[오마이뉴스 최승필 기자]

이제 우리의 고생은 끝났다 ?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신당동에 살던 나는 집앞에 있던 재래시장에 콩나물을 사러 갔다가 몹시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채소가게 주인 아줌마가 들어오는 손님들을 한명 한명 붙들고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고생은 끝났으며 조만간 매우 잘 살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웃지 못할 광경에 잠시 넋이 나가 있자니, 이에 화답하는 손님들의 반응이 또 가관이었다. 거 참 맞는 말씀이라며 맞장구를 치시는데 분위기가 참으로 훈훈하기 그지 없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종부세에 피해를 보실 만한 부자는 아니신데, 대형 마트에 상권이 비쩍 말라붙은 재래시장에 다 쓰러져가는 채소가게 아줌마가 틀림없으신데 아무리 봐도 친부자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대통령을 환영하는 이 이해불가능한 시츄에이션.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마따나 '불공정 거래 시대에 성공한 CEO'가 아니던가. 기업프랜들리 하신 이명박 대통령의 불도저 삽이 과연 어디를 향할 것인지 모르셔서 저토록 속없이 좋아하시는 건가? 가슴만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는 서민의 정체성에 부자의 정치색을 가진 자가당착 서민들이 실존한다. 실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압도적으로 많은 게 아닌가 의심되는데 나의 개인 경험과 선거 결과로 미루어보면 거의 확실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 분들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보수우호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아무리 경청해보고, 되짚어 생각해봐도 특별한 이유를 전혀 발견할 수가 없다. 그저 '어른이면 보수적이어야 한다', '구관이 명관이다', '보수 정당은 어른들의 정당, 진보 정당은 젊은 것들의 정당'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야' 하는 식의 애매모호한 선입견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수우호적'인 이유가 애매모호하고 희박하다보니 말발에서 항상 '젊은 것들'에게 밀린다. 그래서 이런 분들이 잘 하시는 말씀이 '젊은 것들은 쥐뿔도 모르면서 입만 살았다'고 하거나 큰 목소리를 내세워 막무가내로 우겨버리기 일쑤다. 대개 이 분들은 당신들이 지지하는 '보수 정당'이 어떤 법을 입안했고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거의 아는 바가 없으시거나 잘못 알고 계신 경우가 많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법안의 효력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거나.


등록금 마음대로 못 올리게 하자는데도 공산주의?


'사학법 개정'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법은 '교육의 사유화를 막자'는 매우 훌륭한 취지의 법이다. 사학재단이 마음대로 등록금을 올리지 못하도록, 학교 돈을 멋대로 유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이 법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을 친 때가 바로 이 '사학법 개정'을 시도했을 때였다. '대통령 욕하는 게 국민 스포츠'라는 말이 나돈 건 애진작이었지만 이 무렵이 아마도 최고의 절정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 무렵, 회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인자하신 택시기사 아저씨의 말씀이 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뉴스 들었어요? 내 참 기가 막혀서. 개인 돈 들여서 학교를 지었는데 그거를 나라가 빼앗아간다는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안 그래요? 순 날도둑 놈 심보지요.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저번에는 집 가진 사람들한테 세금 폭탄 날리더니 이제는 학교까지 내참 대한민국이 무슨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노무현이가 참 여러 사람 잡아요."


꼭 종합부동산세를 왕창 내셔야 하는 분처럼, 아들 딸 등록금을 껌값 정도로 여기는 분처럼 택시 기사 아저씨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그 무렵에 바닥을 친 걸 보면 수많은 국민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기에 힘입은 보수정당과 사학을 가진 종교단체들은 눈물을 흘리며 삭발 투쟁에 나섰고 그 결과 사학법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으나마나한 법이 되었다. 그리하여 몇 년 후 등록금 천 만 원 시대가 도래했다.


정말로 놀라운 반전은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년이었다. "노무현이가 잘못해서 등록금이 이렇게 오른 것"이라는 반응을 심심찮게 듣게 된 것이다. 아무리 대통령 욕하는 게 국민스포츠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는 것 아닌가.


부자들이 힘들어지면 서민들은 더욱 가난해진다?


과연 나와 동시대에 살고 계신 이 많은 분들이 정말로 이렇게까지 철면피한 것일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분들은 '사학법 개정'과 '등록금 인상' 의 연관관계에 대해서 100% 무지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 분들이 막연히 바란 것은 '사학법 개정은 안 하면서 등록금도 인상 안되는' 판타지였던 셈이다. 동그란 세모를 누가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현상은 정체성과 정치색의 완벽한 이율배반 때문에 일어난다. 이 분들은 본인들의 자가당착은 잊으신 채 '동그란 세모'를 만들지 못하는 정치인들을 한없이 미워하시는 것이다.


이 분들은 부자처럼 생각하신다. 직접세 때문에 부자들이 힘들어지면 서민들은 더욱 가난해진다는 보수 진영의 논리를 철썩같이 믿으신다. 그런데 이 분들은 직접세를 안 올리면 간접세가 오른다는 건 또 모르신다. 보수 정당이 집권하면 간접세가 올라서 불만이고, 진보 정당이 집권하면 부자들을 쥐어짜는 것 같아 못마땅하다.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 리가 없으니 결국엔 '정치하는 놈들이 다 그렇다'는 식이 되고 만다. 그래도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견고한 건 '보수는 어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위기 따위는 이 무지한 선입견 앞에 힘을 잃는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앞날은 어둡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서민들은 이제 정치인 박근혜를 바라본다. 물론 인물은 중요하다. 하지만 인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몸담고 있는 정치 세력의 색깔이다. 정치인 박근혜와 이명박 대통령은 같은 정당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정확히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이다.


정치인 박근혜라고 해서 '미디어법'을 상정하지 않았을까?

정치인 박근혜라고 해서 '미친소'를 수입하지 않았을까?

정치인 박근혜라고 해서 '종부세'를 폐지하지 않았을까?


착한 사자는 고기를 안 먹고 풀을 뜯어먹나? 나는 그런 사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의석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으면 안된다고 열변을 토하던 우리 동네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슬프고 화가 난다. 수많은 서민들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욕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결국 '말본새가 형편없다'는 게 그 분들 주장의 핵심이었다. '막 하자는 거지요'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소리를 툭툭 하는 게 무슨 대통령이냐는 거였다. 그걸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성깔'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그 '성깔'이 '원칙을 지키는 깐깐함'의 또 다른 면모라는 걸 그 분들은 보지 않는다. 그 분들은 '성깔이 있는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왜 국민은 모든 책임에서 항상 자유로워야 하는가?


이명박 대통령이 요즘 욕을 많이 먹는다. 한나라당도 욕을 먹는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는 이명박 대통령이나 한나라당의 잘못이 아니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어째서 국민은 정치인에게 모든 잘못을 미루는가? 왜 국민은 모든 책임에서 항상 자유로워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을 선택한 것은 국민 스스로이면서 말이다.

이럴 줄 몰랐다고 말한다면 너무 무책임하다. 그건 아무 생각 없이 투표장에 들어갔다는 것, 무엇이 상식적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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