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의 장막

분배와 관련된 정의의 논의에서 최고의 권위로 인정받는 롤즈(J. Rawls)의 이론은 원초적 상황(original position)이라고 불리는 가상적 상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것은 아직 아무런 사회질서도 세워져 있지 않은 원시의 상태다. 따라서 사람들은 앞으로 사회가 어떤 기본질서를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이들이 과연 어떤 기본질서에 합의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바로 롤즈의 정의론(正義論)이다.

롤즈는 이 원초적 상황에서 사람들은 모두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에 가려 있다고 설명한다. 사회에서 앞으로 자신의 위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른다는 뜻에서 무지의 장막에 가려 있다는 비유를 쓴 것이다. 이런 상황을 설정한 데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의 기본질서를 논의할 때 불편부당하고 공정한 태도를 갖게 만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자신이 어떤 사회적 위치를 차지할지 알고 그 입장에서 발언하는 사람이 불편부당하고 공정한 태도를 취할 리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적 이슈든 간에 이런 가상적 상태에서 출발할 수 있다면 공정한 해결책을 찾는 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편협한 이해관계를 초월해 허심탄회한 자세로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맞댈 것이기 때문이다. 근시안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 보았자 공정한 해결책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롤즈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편협한 이해관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한 공정한 사회질서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요즈음 종부세와 관련된 논란을 보면서 롤즈의 정의론을 또다시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공정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을 느낀다. 내가 그 동안 만나본 사람들 중 종부세를 내면서 종부세 제도를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업가든, 교수든, 공무원이든 직업과 관련 없이 종부세가 얼마나 나쁜 세금인지를 침이 마르도록 얘기하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종부세를 내지 않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종부세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종부세 제도가 무력화되면 당장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애국심이 유달리 강해서 세금 내는 것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워낙 동정심이 강해 종부세 내는 부자들이 애처롭게 보여 그런 것일까?

그 어느 쪽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부세가 무슨 세금인지, 그것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보수언론이 종부세는 이래서 나쁘다 저래서 나쁘다는 기사로 도배를 하니 세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간 심지가 굳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일방적 선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종부세를 반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얘기해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종부세에 관해 공정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가능한 일이다. 그 논의가 언제나 종부세는 무조건 나쁘다는 식으로 흐르고 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종부세 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논의가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지는 너무나도 뻔한 게 아닌가? 공정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롤즈가 말하는 무지의 장막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슈에 관해 불편부당하고 공정한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마치 그 장막에 가려진 상태인 것처럼 느껴야 한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쉽게 말해 자신이 종부세를 낸다는 사실을 잊어야만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건전한 시민 혹은 지식인이라면 의당 갖춰야 할 자세로서 무지의 장막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종부세를 내는 사람들 중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사회 지도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편협한 이해관계의 포로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종부세에 관한 공정한 해결책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은 편협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남들에게는 불편부당하고 공정한 자세를 가지라고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공정한 사회질서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든 일이다.

미국 사회에서 일부 진보진영의 인사를 비꼬아 부르는 별명으로 ''리무진 리버럴''(limousine liberal)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은 리무진을 타고 다닐 정도로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 없는 사람을 위해 주는 척하는 모습이 우습다는 뜻이 담긴 별명이다. 한 마디로 말해 그들은 위선자라는 뜻에서 그런 별명을 붙인 것이다. 실제로 미국 진보진영의 면면을 보면 보수진영 못지않게 부유한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부자들이 진보적인 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아니꼽게 보는 시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아니꼬운'' 모습조차 찾아보기 힘들까? 우리 사회에서는 밥술이나 뜨는 사람 중에서 진보적 이념을 지지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비단 종부세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적 이슈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이해관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교육이나 의료제도 문제도 돈 있는 자기들에게만 유리한 구도를 주장할 뿐 가난한 사람들과 공평하게 기회를 나눠 갖는 방안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다.

미국에서는 상속세를 폐지 움직임에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선 것이 빌 게이츠나 워렌 버펫 같은 부자였다. 상속세를 폐지하면 가장 이득을 볼 사람들이 먼저 반대하고 나서니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을 존경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오게 된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부자들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나라의 게이츠나 버펫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상속세 몇 푼 덜 내려고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요령이나 부려왔을 뿐이다. 미국 사회가 왜 늘 튼튼하고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지에 대해 궁금해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오늘 아침 종부세를 내고 왔지만, 이번처럼 내기가 싫은 적이 없었다. 나와 똑같은 경제적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내지 않는 세금을 나만 내야 하는 불공정성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종부세제도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헌재의 위헌 결정에 힘을 얻어 정부는 이런저런 편의주의적 손질로 종부세제도를 누더기로 만들어 놓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위헌 결정의 후속조치로 내놓은 안은 벌써부터 땜질식 처방의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다.

모든 국민이 무지의 장막에 가려진 상태로 종부세 문제를 논의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귀결을 보게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상당수의 리무진 리버럴들이 있어 부유한 사람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일종의 명예라는 올바른 목소리를 냈어도 결과가 크게 달라졌으리라고 믿는다. 종부세 내는 사람들이 단 한 치도 양보하려 들지 않고, 정부가 막무가내로 이들의 손을 들어준 탓에 지금의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종부세 논쟁은 상위 2%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들이 무지의 장막을 걷어내고 자신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주장한 결과 이런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슈와 관련해서는 또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그들과 똑같이 무지의 장막을 걷어내고 자신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상위 2%의 사람들도 전혀 양보를 하려들지 않는데 그들보다 가난한 우리가 왜 양보를 해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게 틀림없다. 종국에는 사회의 모든 계층이 한 치도 양보하려 들지 않는 극도의 혼란이 빚어질지도 모른다.

최소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계층에 있는 사람들만은 자신의 편협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 무지의 장막 뒤에 가려지는 상태를 선택해 불편부당하고 공정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종부세 논쟁에서 그들이 보인 행태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나는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우리 사회가 계층간 갈등의 불안정한 양상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모든 것의 책임이 그들과 그들을 일방적으로 편들어준 정부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옵니다...

인터넷에서 세금관련 뉴스를 보고 있자니 너무 힘이 안나는군요
뉴스에 달린 댓글 몇가지만 한번 담아봅니다...
(댓글 다신 분 허락을 받진 않은지라 죄송하군요.. 너그러이 이해를...)


뉴스제목 : 근소세 28%↑ 종소세 29%↑…근로·자영업자 稅 부담 급증

댓글1 ...
이제사 누굴 원망 하겠습니까....
공감 : 50 ( 50 - 0 )
지금까지 한나라당과 그 소속 인간들이...
언제 서민을 위한 일이나 행동을 한 적 있습니까??
(선거때 그 말도 안되는 사탕발림들 말고는 한거 없습니다 ㅡㅡ;;)
그들의 논리는 항상 똑 같았습니다. 부자와 기업을 위하는 길이
콩꼬물이라도 떨어지길 바라는 서민을 위하는 길이다는 논리 입니다.
그리고 그 콩꼬물에 눈이 어두워서 주구장창 뽑아준 국민 맞고요.
그러니 그들이 그 이득 많고 잘먹히는 방법을 버릴리가 있겠습니다.

정말 생각이 있는 사람이고 바보가 아니라면...
그동안의 수도 없는 반복의 결과로 그들이 정권을 잡으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법안을 추진하고 어떤 이들이 권력에 앉을꺼다.
정말 몰랐습니까??? 정말 자신이 못바라볼 높은 곳에 한없이 충성하는...
그 근성... 그 무식함이 이런 일과 이런 결과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다시 투표해 봐야 결과는 거의 변하는 것 없습니다.
이렇게 최악의 지지도를 보이는 정부에 욕먹는 정부지만...
그 욕하던 사람들은 선거때는 어딘가로 다 사라지고 투표 안합니다.
하지만 누가 머라던 충성을하는 근성이 뿌리 깊게 박힌 사람들은...
선거때 보란듯이 한가하게 룰루랄라 선거하러 가는게 현실 입니다.
(정신나간 뉴라이트 같은 애들하고 예전에 선물받은 노인네들 정정 합니다.)

이제사 후회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다음 선거때 바꾸리라???
거참... 한나라당은 이렇게 욕먹는데 지지도는 항상 1위더군요 ㅡㅡ;;
그러니 저들이 미쳤다고 서민을 위하겠습니까?? 이래도 항상 뽑아주는걸...
아마 속으로 엄청 우습게 생각하고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일겁니다.
저런 썩을 인간들이 문제인게 먼저인지...
계속 1등을 만들어 주는 문제 많은 국민들이 먼저인지....
다음에는 선거라도 하고 욕을 하던가 합시다.


댓글2 ...
어제 100분 토론 정말 어이 없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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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서울시립 세무학과 교수라는 분은 자기만의 소신을 믿고 발언해서 괜찮았지만

그 한나라당 의원........... 한나라당 의원의 질을 알 수 있었다. 할 말 없으니까 했던 말 또하고 했던 말 또하고

무엇보다 종부세 인하로 인해 세금이 줄면 그 준 세금을 어떻게 메꿀거냐고 계속 물어보니까 대답이 ~~ 할것이다 가 아니고 ~~ 하면됀다라고 말한다. 어이가 없는거다. 세금 줄어드는거 보충할 방법도 생각하지도 않은채 그냥 무작정 줄이는 그런 어이없는 행위

민주당 의원이 말바꾸기다( 재산세 인상에서-> 종부세 인하되는 사람만 재산세 올린다) 라고 비판하고 하는데 끝까지 그냥 뭐 어디에서 올리면 돼고 돼고 누가 그런말 듣고 싶데냐

결국 쭉 지켜본 결과 종부세가 얼마나 좋은 제도인지 알았다. 종부세로 걷어들인 세금이 지방으로 대부분 가고 거기서 지역 복지나 교육등 양극화에 쓰인다는 걸 알았고

시민논객이 말한 1~2% 정당을 비판하면서 98%를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하는거 아니냐는 어이없는 말도 듣고 ㅋㅋㅋㅋ

전화통화로 들은 서초구 어떤 분이 하신 말: 집값이 많이 올라서 세금 내기 힘들다고 하고 첨부터 살고 있던 사람은 세금을 깍아줘야된다고 하시면서 그러면 집 팔면 돼지 않냐는 말은 내가 벌어서 산 내 집인데 어떻게 그러냐는 정말 어이없는 말을 하셨다. 적어도 10년세 버블로 아주 적어도 5억은 올랐으텐데 자기 집이라 못판다 그래서 세금 낮춰달라는 상류층의 한마디를 듣자니 짜증났다. 자기집이니까 못팔아요라니.... 지금 돈 한두푼에 너무나 힘들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또 듣자니 종부세는 국세지만
종부세를 폐지하고 음 재산세였나?? 를 올리면 이게 국세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이말은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등만 돈을 많이 번다는 애기다................. 모르겠다.

결론은 어제 토론 한나라당 의원 저~~~~~~~질이었다.


댓글3 ...
이래저래 죽어나는건 월급쟁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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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상위층은 여당의 지지아래 감세대상이 되고 하위층은 원래 소득세도 거의 안내지만 유가 환급도 받고 이래저래 죽어나는 건 감세, 유가환급 등 아무런 감세 혜택없는 중간층 봉급쟁이들 뿐이네.

유류세는 내 본적도 없는 소득층에 유류세환급 해주는건 어차피 세상은 같이 살아가는 거니까 좋게 이해한다 쳐도 중간급은 너무 소외되는거 같다.
만만한게 중간층 봉급쟁이니 점점 중산층이 서민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아무튼 혜택 못받는 중산층도 결국은 서민층에 노블리스오블리제 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진데 소득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좀더 부담하는 것에 대해 너무 민감해 하는 거 아닌지.

자기는 지하 셋방에서 월세 걱정하면서도 6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들을 더 걱정해주는 측은지심 넘치는 국민들이 많아서 그런걸 어째요. 그냥 그러려니 해야죠.


댓글4 ...
당연한 수순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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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나갈데는 빤히 정해져 있는데, 무작정 대기업과 부자들 세금을 깎아줬으니, 다른데서 더 걷을 수 밖에.
제대로 된 조세정책이면 부자와 대기업에서 더 걷고, 중소기업, 서민들 세금은 깎아주는 방향으로 갈 텐데, 이건 완전히 반대니..
그러게, 저런걸 왜 뽑아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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