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옵니다...

인터넷에서 세금관련 뉴스를 보고 있자니 너무 힘이 안나는군요
뉴스에 달린 댓글 몇가지만 한번 담아봅니다...
(댓글 다신 분 허락을 받진 않은지라 죄송하군요.. 너그러이 이해를...)


뉴스제목 : 근소세 28%↑ 종소세 29%↑…근로·자영업자 稅 부담 급증

댓글1 ...
이제사 누굴 원망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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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나라당과 그 소속 인간들이...
언제 서민을 위한 일이나 행동을 한 적 있습니까??
(선거때 그 말도 안되는 사탕발림들 말고는 한거 없습니다 ㅡㅡ;;)
그들의 논리는 항상 똑 같았습니다. 부자와 기업을 위하는 길이
콩꼬물이라도 떨어지길 바라는 서민을 위하는 길이다는 논리 입니다.
그리고 그 콩꼬물에 눈이 어두워서 주구장창 뽑아준 국민 맞고요.
그러니 그들이 그 이득 많고 잘먹히는 방법을 버릴리가 있겠습니다.

정말 생각이 있는 사람이고 바보가 아니라면...
그동안의 수도 없는 반복의 결과로 그들이 정권을 잡으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법안을 추진하고 어떤 이들이 권력에 앉을꺼다.
정말 몰랐습니까??? 정말 자신이 못바라볼 높은 곳에 한없이 충성하는...
그 근성... 그 무식함이 이런 일과 이런 결과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다시 투표해 봐야 결과는 거의 변하는 것 없습니다.
이렇게 최악의 지지도를 보이는 정부에 욕먹는 정부지만...
그 욕하던 사람들은 선거때는 어딘가로 다 사라지고 투표 안합니다.
하지만 누가 머라던 충성을하는 근성이 뿌리 깊게 박힌 사람들은...
선거때 보란듯이 한가하게 룰루랄라 선거하러 가는게 현실 입니다.
(정신나간 뉴라이트 같은 애들하고 예전에 선물받은 노인네들 정정 합니다.)

이제사 후회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다음 선거때 바꾸리라???
거참... 한나라당은 이렇게 욕먹는데 지지도는 항상 1위더군요 ㅡㅡ;;
그러니 저들이 미쳤다고 서민을 위하겠습니까?? 이래도 항상 뽑아주는걸...
아마 속으로 엄청 우습게 생각하고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일겁니다.
저런 썩을 인간들이 문제인게 먼저인지...
계속 1등을 만들어 주는 문제 많은 국민들이 먼저인지....
다음에는 선거라도 하고 욕을 하던가 합시다.


댓글2 ...
어제 100분 토론 정말 어이 없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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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서울시립 세무학과 교수라는 분은 자기만의 소신을 믿고 발언해서 괜찮았지만

그 한나라당 의원........... 한나라당 의원의 질을 알 수 있었다. 할 말 없으니까 했던 말 또하고 했던 말 또하고

무엇보다 종부세 인하로 인해 세금이 줄면 그 준 세금을 어떻게 메꿀거냐고 계속 물어보니까 대답이 ~~ 할것이다 가 아니고 ~~ 하면됀다라고 말한다. 어이가 없는거다. 세금 줄어드는거 보충할 방법도 생각하지도 않은채 그냥 무작정 줄이는 그런 어이없는 행위

민주당 의원이 말바꾸기다( 재산세 인상에서-> 종부세 인하되는 사람만 재산세 올린다) 라고 비판하고 하는데 끝까지 그냥 뭐 어디에서 올리면 돼고 돼고 누가 그런말 듣고 싶데냐

결국 쭉 지켜본 결과 종부세가 얼마나 좋은 제도인지 알았다. 종부세로 걷어들인 세금이 지방으로 대부분 가고 거기서 지역 복지나 교육등 양극화에 쓰인다는 걸 알았고

시민논객이 말한 1~2% 정당을 비판하면서 98%를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하는거 아니냐는 어이없는 말도 듣고 ㅋㅋㅋㅋ

전화통화로 들은 서초구 어떤 분이 하신 말: 집값이 많이 올라서 세금 내기 힘들다고 하고 첨부터 살고 있던 사람은 세금을 깍아줘야된다고 하시면서 그러면 집 팔면 돼지 않냐는 말은 내가 벌어서 산 내 집인데 어떻게 그러냐는 정말 어이없는 말을 하셨다. 적어도 10년세 버블로 아주 적어도 5억은 올랐으텐데 자기 집이라 못판다 그래서 세금 낮춰달라는 상류층의 한마디를 듣자니 짜증났다. 자기집이니까 못팔아요라니.... 지금 돈 한두푼에 너무나 힘들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또 듣자니 종부세는 국세지만
종부세를 폐지하고 음 재산세였나?? 를 올리면 이게 국세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이말은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등만 돈을 많이 번다는 애기다................. 모르겠다.

결론은 어제 토론 한나라당 의원 저~~~~~~~질이었다.


댓글3 ...
이래저래 죽어나는건 월급쟁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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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상위층은 여당의 지지아래 감세대상이 되고 하위층은 원래 소득세도 거의 안내지만 유가 환급도 받고 이래저래 죽어나는 건 감세, 유가환급 등 아무런 감세 혜택없는 중간층 봉급쟁이들 뿐이네.

유류세는 내 본적도 없는 소득층에 유류세환급 해주는건 어차피 세상은 같이 살아가는 거니까 좋게 이해한다 쳐도 중간급은 너무 소외되는거 같다.
만만한게 중간층 봉급쟁이니 점점 중산층이 서민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아무튼 혜택 못받는 중산층도 결국은 서민층에 노블리스오블리제 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진데 소득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좀더 부담하는 것에 대해 너무 민감해 하는 거 아닌지.

자기는 지하 셋방에서 월세 걱정하면서도 6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들을 더 걱정해주는 측은지심 넘치는 국민들이 많아서 그런걸 어째요. 그냥 그러려니 해야죠.


댓글4 ...
당연한 수순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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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나갈데는 빤히 정해져 있는데, 무작정 대기업과 부자들 세금을 깎아줬으니, 다른데서 더 걷을 수 밖에.
제대로 된 조세정책이면 부자와 대기업에서 더 걷고, 중소기업, 서민들 세금은 깎아주는 방향으로 갈 텐데, 이건 완전히 반대니..
그러게, 저런걸 왜 뽑아줬냐고!






조선 건국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있어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숙이고 외면했어야 했다.

눈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맞는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면서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넘치는 우리의 젊은 아이들에게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둬라.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입니다. "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있는 역사의 땅입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병탄되었던 우리 땅입니다.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편입하고 점령했던 땅입니다.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으킨 한반도 침략전쟁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빌미로 우리 땅에 군대를 상륙시켜 한반도를 점령했습니다.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황실과 정부를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토지와 한국민을 마음대로 징발하고 군사시설을 마음대로 설치했습니다.
우리 국토 일부에서 일방적으로 군정을 실시하고 나중에는 재정권과 외교권마저 박탈하여 우리의 주권을 유린했습니다.


일본은 이런 와중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 망루와 전선을 가설하여 전쟁에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점령상태를 계속하면서 국권을 박탈하고 식민지 지배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지금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의한 점령지의 권리, 나아가서는 과거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학살, 40년간에 걸친 수탈과 고문, 투옥, 강제징용,
심지어 위안부까지 동원했던 그 범죄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완전한 주권회복의 상징입니다.
야스쿠니신사참배, 역사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 그리고 미래의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
일본이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고 그에 근거한 권리를 주장하는 한, 한일 간의 우호관계는 결코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일본이 이들 문제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한일 간의 미래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어떤 수사도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경제적인 이해관계도, 그리고 문화적인 교류도 이 벽을 녹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한일 간에는 아직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가 획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고, 그 위에서 독도기점까지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해해저 지명문제는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배타적 수역의 경계가 합의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일본이 우리 해역의 해저지명을 부당하게 선점하고 있으니 이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따라서 일본이 동해해저 지명문제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배타적 경제수역에 관한 문제도 더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되었고, 결국 독도 문제도 더 이상 조용한 대응으로 관리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독도를 분쟁지역화 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견해가 없지는 않으나,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확립을 상징하는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정부는 독도문제에 대한 대응방침을 전면 재검토하겠습니다.
독도문제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야스쿠니신사참배 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인식, 자주독립의 역사와 주권수호의 차원에서 정면으로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물리적인 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세계 여론과 일본 국민에게 일본 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끊임없이 고발해 나갈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잘못을 바로잡을 때까지 전국가적 역량과 외교적 자원을 모두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해나갈 것입니다.
그밖에도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할 것입니다.
어떤 비용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역사를 모독하고 한국민의 자존을 저해하는 일본 정부의 일련의 행위가 일본 국민의 보편적인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일 간의 우호관계,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가 결코 옳은 일도, 그리고 일본에게 이로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일본 국민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냉정하게 대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국민과 지도자들에게 간곡히 당부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사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누차 행한 사과에 부합하는 행동을 요구할 뿐입니다.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행위로 한국의 주권과 국민적 자존심을 모욕하는 행위를 중지해달라는 것입니다.
한국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와 기준에 맞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실과 인류사회의 양심 앞에 솔직하고 겸허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이웃나라에 대해서, 나아가서는 국제사회에 이 기준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일본은 그 경제의 크기에 알맞는 성숙한 나라, 나아가서는 국제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로 서게 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선린우호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지향 속에 호혜와 평등, 평화와 번영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해 왔고 또 큰 관계 발전을 이뤘습니다.
이제 양국은 공통의 지향과 목표를 항구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 더욱더 노력해야 합니다.
양국관계를 뛰어넘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나아가서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사의 올바른 인식과 청산, 주권의 상호 존중이라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사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과감히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21세기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 나아가 세계평화를 향한 일본의 결단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매일경제  기사전송 2008-04-05 16:15


오래 전 만났던 강남의 알부자 가운데 전직 대통령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테헤란로에만 대형 건물을 여러 동 가지고 있었고 개발하지 않은 땅까지 합하면 그의 재산이 얼마나 될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소나타를 타고 다녔다. 그 많은 재산을 일군 사람은 부친이었고 자신은 그저 관리인이기에 그런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의 부친이 웬만한 재벌 부럽지 않을 정도의 부를 형성한 과정을 물으니 강남이 개발되기 전에 계속 사 모았던 땅 값이 올라서 그렇게 됐다고 했다.

세계적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는 어떤가. 그 역시 개발되지 않은 땅을 싼 값에 사서 개발해 비싸게 팔아 부를 이뤘다. 그의 대표적 성공작인 그랜드센트럴하얏트가 그랬다. 그 뒤 콘도미니엄(한국의 고급맨션)을 세워 떼돈을 번 곳들도 이스트리버를 비롯해 맨해튼에선 변두리로 취급됐던 지역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엄청난 부를 거머쥔 데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기다릴 줄 알았다는 것이다.

강남 갑부의 부친은 평생 버는 대로 땅을 사들였다. 그가 노년이 됐을 때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트럼프 역시 기다림의 고수다. 회전이 비교적 빠른 개발 전문의 트럼프도 부동산을 산 뒤 20년 이상 기다린 적도 있다고 한다.

장사를 하건 투자를 하건 돈을 버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한 가지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짜 쌀 때는 사지 못한다. 몰라서 그러기도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그러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서브프라임 사태라고 부르는 이번 금융위기는 사실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였다. 더욱이 어느 정도 답이 보이는 게임이기도 했다. 그런대도 대다수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예를 들어보자. 지난 3월 11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신용경색을 풀기 위해 직접공급 방식으로 2000억 달러를 긴급 투입키로 했다. 유럽중앙은행이나 스위스은행 등 각국의 중앙은행들도 금융위기를 타개하는데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런데도 주가는 수직으로 떨어졌다. 3월 17일엔 코스피가 장중 1500대 중반을 밑돌기까지 했다. 투자자들이 주식을 내던졌기 때문이다.

다음 날 신문엔 재미있는(?) 게 나왔다. 매일경제신문 1면 톱 제목은 ‘금융시장 패닉…’으로 나가고 있다. 시장이 투자자들의 비정상적인 심리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됐음을 나타내는 얘기다.

시장이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가격이 떨어졌다는 것으로 시장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가격이 오를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각국 금융당국이 시장 안정을 위해 얼마든지 돈을 풀 수 있다는 의지까지 보였으니 답을 다 가르쳐준 셈이 아닌가.

그 뒤 증시는 상승세로 돌아섰다. 가파르게 빠졌던 만큼 오름세도 가파르다.

주가가 살아나면 투자자들이 다시 돌아온다. 주가가 폭등하면 더 많은 투자자들이 몰려든다. 이런 게임에서 누가 승리자가 될 것인가는 뻔하다.

프로는 비싸게 사서 더 비싸게도 팔지만 아마추어가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기는 좋은 방법은 진짜 쌀 때 사놓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주식이건 부동산이건 최근 값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싼 종목들은 많다. 인기 경쟁에 밀려서 내재가치 이하에서 머무는 것들도 숱하다.

그중에는 전도가 유망한 것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문제는 단기간에 소폭의 이익을 노리느냐, 아니면 5년 이상을 두고 배 이상을 기대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호흡을 길게 하면 새로운 투자대상이 보인다. 한 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강북 아파트들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것은 좋은 사례이다.

이런 점에서 템플턴의 이머징마켓 부문 대표인 마크 모비우스의 얘기는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당신이 돈을 갖고 있을 때가 이머징마켓 투자에 가장 적합한 시기다.”

이머징마켓의 매력을 강조한 것이기는 하지만 긴 호흡으로 본다면 다양한 투자대상에 모두 적용되는 얘기가 아닐까.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23호(08.04.14일자)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주간동아   2008-03-26 09:41:36]
조직생활에서 상하관계는 숙명적이다. 신입사원이 아니라면 누군가의 선배 또는 상사가 돼 후배들과 어울려 일한다. 그런데 언제나 ‘어색한’ 위계질서는 갈등의 불씨가 된다. 상사는 상사대로 부하직원이 성에 차지 않고, 후배들 역시 나름의 불만을 가슴에 새기며 출근도장을 찍는다. 같은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와중에 누군가는 잠깐의 우쭐함을, 누군가는 가슴에 상처를 안아야 하는 모순적 구조에 봉착하는 셈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 또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직장생활에서 누군들 즐겁게 일하며 성공하고 싶지 않을까? 그간 우직하게 인간관계를 닦고 조이고 기름 쳐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 진지하게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성공의 목표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문수(60·사진) 킹웨이인재개발그룹 원장의 주장은 조금 색다르다. 그는 이제까지 변화의 대상이던 ‘부하직원’이 아닌 ‘직장상사’에 초점을 맞췄다.

꼴등에서 1등으로 ‘미다스 이문수 신화’ 탄생
“누구보다 ‘상사’가 먼저 변해야 인생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직장’이라는 성지(聖地)에서 모두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현 대자동차(현대차) 초창기 시절 평범한 영업사원으로 출발해 마침내 부사장 직위에 오르며 이 원장이 깨친 성공 노하우는 다름 아닌 “상사라면 마땅히 부하직원의 마음부터 얻으라”는 것. 비단 업무에서뿐만이 아니다. 후배들에게 인간적인 면까지 존경받을 때만이 기대했던 성과도 나오고 그에 따른 승진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성급한 사람이라면 코웃음 치며 그 증거를 대라고 할지 모른다. 이 원장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30년 직장인생을 펼쳐 보인다. 700명의 부하직원 이름을 외운 일, 이들과 작은 목표를 공유하고, 능력 있는 후배의 성공을 지원하고, 명령이 아닌 끊임없는 설득으로 동료들을 감화시켜온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말이다. 이 모든 정성들이 더해져 그간 현대차 꼴등 대리점들을 줄줄이 1등 대리점으로 변모시킨 ‘미다스 이문수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직장생활 전체를 현장의 영업사원으로 보낸 이 원장은 최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끌리는 상사의 조건’이란 책을 펴냈다. 그가 말하는 ‘부하직원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10가지 노하우’를 들어보자.


[부하직원 내 사람 만드는 10가지 비법]
“관리하지 말고 도울 생각 우선 … 리더는 힘든 일 자청해야”
한동안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다. 그런데 1998년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과 암으로 인한 시한부 선고라는 시련을 겪고야 진지하게 ‘행복’과 ‘성공’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갖게 됐다.
‘행복한 성공’이라는 키워드도 결국은 민주주의의 문제로 연결된다. 권위주의 정권은 사라져도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권위주의는 극복하기 쉽지 않다. 특히 큰 기업일수록 리더십의 변화에 빨리 대처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내 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성과를 내야 한다. ①`조직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하직원이 성공해야 한다. 어떤 최고경영자(CEO)든 입으로는 “인적 자원이 가장 소중하다”고 하지만 사실 ‘립서비스’일 때가 많다. 그간 성과를 위해 대놓고 직원들을 누르고 쪼아온 방법은 잘못된 것이다. 능력 있는 직원일수록 다른 조직으로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
상사로서 가장 시급한 덕목은 ②`직업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부하직원들이 올바른 비전과 뚜렷한 목표를 갖도록 제시해주면 상사의 지시 없이도 스스로 움직인다. 나아가 그런 비전이 공유된 조직이라면 그 자체로 빛을 발한다. 영업사원이란 자리에 별 보람을 느끼지 못했던 나도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마음을 정리했다.
“애도 낳았고 가족도 있는데, 어떻게 하면 잘 살수 있을까? 기왕 젊은 시절 회사를 다니는데 정말 잘해보고 싶다.”
놀랍게도 그 뒤부터 인생이 달라졌다. 성공하기 위한 첫 단추는 마음을 어떻게 먹고 어떻게 비전을 세우느냐에 달렸는데, 상사의 임무란 후배에게 목표와 비전을 갖게 만드는 것과 그 비전을 현실화하는 역량을 교육시키는 일이다.
비 전 외에 현실적인 목표도 중요하다. 나는 후배들에게 가시적인 목표로 ③`집을 사라는 원칙을 주입시켰다. 사실 영업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많다 보니 술을 마시게 되고 자연스레 저축은 뒷전인 경우가 많다. 그런 생활이 지속되면 결국 일도 열심히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런데 집을 사려면 저축해야 하니 한두 시간이라도 더 일해 실적을 올리게 된다.
부하직원 가운데 총각이 많으면 결혼하라 닦달하고, 진급이 누락되면 그것을 메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상사의 도리다. 후배들에게 목표를 만들어줘야만 진짜 선배고, 리더는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역량을 계발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 같은 모습이 어색한 것은 기존 상사들은 조직을 무작정 ‘관리’하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후배들은 몸만 따르게 된다. 옛날에는 권위가 있었기에 따라가는 시늉이라고 했지만, 이젠 권위마저 없으니 망가지는 것은 조직뿐이다. 이 때문에 이 시대의 상사는 조직을 ④`관리하지 말고 지원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후배들을 도울 수 있을까? 1994년 서울 K지역 책임자로 부임했을 때 얘기다. 말 그대로 영업실적 최하위 지점이었다. 영업은 일선에서 하는 건데 나 혼자 고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중요한 건 직원들의 의욕인데, 그렇다면 분위기가 좋아야 한다. 스스로 ⑤`직원들을 기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매일 아침저녁 사무실이 아닌 지점으로 출근했다.
직원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700여 직원 모두의 이름을 3개월 걸려 외웠는데 그 효과는 대단했다. 술을 마시다 “어이 ○○대리, 이리 좀 와봐” 하고 등 두드려주고 술 먹어줬을 뿐인데, 그 직원이 거의 울려고 하는 걸 봤다. 그해 우리 지점은 영업실적 전국 1등이 됐다. 직원들을 격려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 상사가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면 직원들은 자연스레 상사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업무 지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예를 들어 영업사원들은 서류업무에 미숙한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내근직원들과의 분쟁도 적지 않게 일어나는데, 대부분의 상사들은 “왜 싸웠을까?”라고 묻기보다는 “화해하라”는 식으로 얼버무린다.
이런 경우 내근직 사원에게는 ‘영업사원들에게 친절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교육시키고, 영업직원들을 위해서는 내부 업무 프로세스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은 상사의 의무다. 이게 바로 쓸모 있는 지원이다.
돌 이켜보면 이 같은 ⑥`사소한 불편이 직원들의 능력을 갉아먹더라. 시스템 문제가 아니더라도 더러운 사무실에서 직원들의 성과가 좋을 리 없다. 상사가 나서서 “너희는 집이 이렇게 더럽냐”고 말하면 언제나 그대로 지저분할 뿐이다. 말없이 상사가 휴지를 줍는다면 언제나 깨끗한 사무실이 유지된다. 상사란 마땅히 ⑦`힘든 일을 자청해야 한다. 영업을 책임진 사람이라면 직원들이 일요일에도 최선을 다해 일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작정 휴일에 나와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점장이 먼저 나오는 길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
한번 아프고 나니 ‘시간’과 ‘일’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그냥 다닌다고 생각했지 나의 ‘역사’를 쓴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병상에서 투병생활하는 것보다 일하다 쓰러지는 편이 더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파도 회사에 나왔다.
암 투병 직후인 2000년에 P지역 책임자로 발령이 났다. 어느 지점에나 ⑧`가정과 같은 직장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후배들에게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들이 각자의 역사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더니 그 진심이 통하더라. 일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후배들이 나를 형이나 부모처럼 따랐다. 나를 부모처럼 배려하는 그들과 함께 일하는데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었다. 암도 완치됐고 예상치 못하게 부사장으로까지 승진했다.
30년 직장생활을 돌이켜보면서 이제 상사가 된 후배들에게 직장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충고를 받아들이라고 말해준다. ⑨`직원을 아들이나 동생처럼 사랑하는가? 일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⑩`고객을 진짜 나만큼 소중히 생각하라. 부하직원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상사의 존재는 헛것이 돼버린다.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면 자신의 인생은 실패하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자신의 일과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직장인들의 숙명이자 영원한 과제다.




자전거 출퇴근, 아침은 꼭 챙기세요.

디자이너: Philipp Drexler

아래 기사는 읽으실 때 혹시라도 단순히 천재소년이 국방의무를 다하기 위해 왔다는데 촛점을 두지 마시고 이 청년이 어떻게 천재로 대접받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두고 읽으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저희 큰애가 초등 1학년인데 공부를 봐주면서 느끼는게 자꾸만 단순하게 문제를 풀어서 좋은 점수 받는데만 초점을 두는게 아닌가 싶고,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좀 들었던 차에 이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원리"를 안다는게 참으로 중요하다. 처음에 좀 점수를 낮게 받더라도 원리를 알아가도록 해주는게 중요하구나 하고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 자녀들에게 적용할 점을 찾아보시면 좋을 같습니다. 아주 유익한 기사라고 여겨집니다.


[조선일보   2007-11-27 07:44:56]
 

‘한국의 빌 게이츠’ 꿈꾸는 김지원씨 지난달부터 병역의무 MIT 학부·석사를 만점 학점으로 경악시키고 MS와 구글을 애태운뒤… 박사에도 줄까말까한 고액연봉 마다하고 귀국 “중학교땐 전교 60등… 과학고땐 전체 꼴찌도”

마 이크로소프트(MS)사의 창업자 빌 게이츠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돈을 벌었다. 지난 2000년 서울의 한 소년도 같은 나이에 이미 회원 수 400명이 넘는 하이텔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 동호회를 책임지고 있었다.

7년 후 그 소년은 미 MIT 사상 처음으로 학부·석사 과정을 모두 5.0 만점으로 졸업했다. 지난달 삼성종합기술원에 병역특례연구원으로 입사한 김지원(金智元·22)씨가 주인공. ‘한국의 빌 게이츠’를 꿈꾸던 소년은 이제 MS를 뛰어넘을 계획을 펼치기 시작했다.

김 지원씨는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마치고 ‘삼성이건희장학생’ 1기로 MIT에 입학했다. 컴퓨터·수학 복수 전공으로 학부·석사를 각각 3년, 1년 만에 조기 졸업했다. 학부 졸업 후 미 최고 엘리트 사교 모임인 ‘파이 베타 카파 클럽(Phi Beta Kappa Society)’에도 뽑혔다. 그가 밝힌 성공 비결은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한 것’.

그는 지금도 MS나 구글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그쪽에서 고액 연봉을 제시하는 등 스카우트에 적극 나선 상태지만 그는 거절했다. “MIT 재학 중 MS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원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엑셀(Excel) 개발자로 일하기도 했어요.” 지난 9월 석사학위를 받은 후 구글·MS에서 박사학위자 이상에게도 줄까 말까 한 고액 연봉을 제의 받았지만 병역의무를 마치기 위해 귀국했다.

“구글이 가장 멋진 회사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기술을 만들어냈잖아요. 저도 뭐든 그런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는 화려한 미래를 위해 스스로 진군(進軍) 중이다. 자진 귀국한 것도 병역의무를 마쳐야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 아버지 김병주씨는 “구글을 뛰어넘을 몇 가지 구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석사 논문 주제인 ‘로봇’이 목표냐”고 묻자 “전공인 수학과 컴퓨터를 활용하면 할 만한 일은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스스로 어디까지 개척해 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삼성 주변에서는 어쩌면 MS나 구글을 넘어설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온 터라 미래 가능성 또한 크고 넓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 학교 1학년 때만 해도 성적이 전교 60등에 그쳤다. 강북에서 그 성적으로 과학고에 들어가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학년 때 국제정보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따고는 이왕이면 좋아하는 컴퓨터를 계속 공부해보자고 과학고를 가기로 했어요.”

당 시 최연소 한국 대표에 대회 최연소 금메달리스트 기록을 세웠다. 당시 베이징(北京)대회에선 이전과 전혀 다른 형식의 문제가 나와 모두들 고전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고, 늘 혼자 문제를 해결해왔기 때문에 어려운지도 몰랐다”고 했다.

“지 능이 평균 이상은 되겠지만 천재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아요. 다른 점이라면 뭐든 스스로 답을 찾는 게 습관이 됐을 뿐이죠.” 그는 과학고 입학 후 첫 시험에서 전체 꼴찌를 했다. “그런데 반에서 1등 하던 강남 사는 친구에게 문제의 원리를 물었더니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늘 주어진 대로만 해오던 친구들이라 새로운 상황에선 헤매요.”

반 면 그는 “이런저런 연구를 하려면 어떤 강의를 들어야 할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덕분에 1학년 때부터 미디어 랩 등 MIT의 여러 연구소에서 교수들과 함께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젊은 영 파워의 미래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주목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이영완 기자(글) ywlee@chosun.com ]

[전기병 기자(사진) gibong@chosun.com]

 
(급식 시간. 급식 아주머니가 밥을 퍼준다.)
"학생... 적은가?"
"... 아뇨, 테란입니다."


from  만화 '나비효과'



------------해석------------

"학생... Zerg은가?"
"... 아뇨, Teran입니다."



 



[아내의 빈 자리]


아내가 어이없는 사고로 내 곁을 떠난 지 4년,

밥도 할 줄 모르는 남편과 아이를 두고 떠난 아내의 심정이 오죽했을까마는

난 나대로 아이에게 엄마 몫까지 해주지 못하는 것이 늘 가슴 아팠다.


언젠가 출장을 떠나기 위해 이른 새벽

아이에게 아침밥도 챙겨주지 못한 채 서둘러

집을 나선 적이 있었다.

전날 먹다 남은 밥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에 계란찜만 얼른 데워 놓고

잠이 덜 깬 아이에게 대충 설명을 한 뒤 출장지로 내려갔다.


전화로 아이의 아침을 챙기느라 제대로 일도 못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나는 아이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피곤한 몸에

저녁밥 걱정은 뒤로한 채 방으로 들어와 양복을 벗어 던지고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그 순간 “푹!” 소리를 내며

빨간 양념국물과 라면가락이 침대보와 이불에 퍼지는 게 아닌가?

뜨거운 컵라면이 이불 속에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 녀석이…

나는 옷걸이를 들고 달려가

장난감을 갖고 놀던 아이의 등과 엉덩이를 마구 때렸다.


“왜 아빠를 속상하게 해! 이불은 누가 빨라고 장난을 쳐, 장난을!”

화가 난 나는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아들의 울음 섞인 몇 마디가 나의 매든 손을 멈추게 했다.

 




아들의 얘기로는 밥솥에 있던 밥은 아침에 먹었고,

점심은 유치원에서 먹었는데,

저녁때가 되어도 아빠가 오시질 않아,

싱크대 서랍에 있던 컵라면을 찾아 끓여 먹었다는 것이다.

가스렌즈를 만지면 안 된다는 아빠의 말이 생각나서

보일러 온도를 ‘목욕’으로 누른 후

데워진 물로 라면을 끓여 하나는 자기가 먹고

하나는 이불 속에 넣어두었다는 것이다.

내가 먹을 라면이 식지 않게 하려고….

아들은 친구에게 빌린 장난감 때문에

내게 얘기하는 걸 깜박 잊었다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싫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 나는 수돗물을 크게 틀어놓고 펑펑 울었다.

한참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와서

우는 아이를 달래 약을 발라주고 잠을 재웠다.

라면 국물에 더러워진 침대보와 이불을 치우고 아이 방을 열어보니,

얼마나 아팠던지 자면서도 흐느끼고 있지 않는가….

녀석의 손에는 엄마의 사진이 있었다.

나는 그저 오랫동안 문에 머리를 박고 서있었다.

 



 


일년 전 아이와 그 일을 당한 후,

아이에게 엄마 몫까지 하느라고 난 나대로 신경을 많이 썼다.

아이는 이제 일곱 살, 얼마 후면 유치원을 졸업하고 학교에 간다.

다행히 아이는 티 없이 맑게 커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전 아이에게 또 한차례 매를 들고 말았다.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이가 유치원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무나 떨리는 마음에 허겁지겁 조퇴를 하고 돌아와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찾다가

동네 문방구 오락기 앞에서 아이를 만났다.

너무나 화가 나서 나는 아이를 때렸다.

그런데 아이는 한마디의 변명도 않고 잘못했다고만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은 유치원에서 엄마들을 모시고 재롱잔치를 한 날이었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아이는 유치원에서 글을 배웠다며

자기 방에서 꼼짝 않고 글 쓰는 일에 열심히 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하늘에서 아내가 미소 짓고 있을 생각을 하니,

나는 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겨울이 되었다.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올 때쯤 아이가 또 일을 저질렀다.

회사에서 퇴근하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다. 동네 우체국 직원이었는데

아이가 우체통에 주소도 안 쓴 장난 편지를 100통이나 넣는 바람에

바쁜 연말 업무에 지장이 많다는 것이다.

서둘러 집으로 간 나는 아이를 불러놓고 다시는 들지 않으려던 매를 들었다.

아이는 이번에도 잘못했다는 소리만 했다.

난 아이를 한 쪽 구석에 밀쳐놓고 우체국에 가서 편지 뭉치를 받아 왔다.

그 뭉치를 아이 앞에 던지며 도대체 왜 이런 장난을 쳤느냐고 다그쳤다.

그러자 아이는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했다. 엄마에게 편지를 보내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을 저미는 듯한 슬픔이 내 눈시울을 적셨다.

하지만 아이가 바로 앞에 있는 터라 나는 아이에게 애써 감추며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이렇게 많은 편지를 한꺼번에 보냈느냐고…

그러자 아이는 우체통의 구멍이 높아서 키가 닿지 않았는데,

요즘 다시 서보니 우체통 입구에 손이 닿기에 여태까지 써왔던 편지를

한꺼번에 넣은 것이라고 했다.

난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잠시 후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하늘에 계시니까 다음부터는 편지를 태워서 하늘로 올려보내…’

아이가 잠든 후 나는 밖으로 나와 그 편지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아이가 엄마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을까

궁금한 마음에 편지 몇 통을 읽었다.

그 중 하나가 나의 마음을 또 흔든다.






보고싶은 엄마에게.


엄마, 오늘 유치원에서 재롱잔치를 했어,

근데 난 엄마가 없어서 가지 않았어.

아빠가 엄마 생각 날까 봐 아빠한테는 얘기 안 했어.

아빠가 날 찾으려고 막 돌아다녔는데

난 일부러 아빠 보는 앞에서 재미있게 놀았어.

아빠가 야단쳤는데 난 끝까지 얘기 안 했어. 엄마,

난 매일 아빠가 엄마 생각나서 우는 거 본다.

아빠도 나만큼 엄마가 보고 싶은가 봐.


근데 나 엄마 얼굴이 잘 생각 안나…

내 꿈에 한번만 엄마 얼굴 보여줘, 응?

보고 싶은 사람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자면 그 사람이 꿈에 나타난대.

그래서 나 매일 엄마 사진 안고 자. 그런데 왜 엄마 안 나타나, 응?


[문화일보   2007-11-21 14:3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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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도 나쁘고 욕먹기 일쑤인 채권추심업. 그러나 힘든 업무 중에도 추심원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들이 있다.

‘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덕목을 몸소 실천하는 이들의 사연이다. 600만원의 빚을 지고 3년째 연락이 두절된 아들의 빚을 대신해 갚은 모친의 이야기는 최근 신한신용정보 추심원 모두의 가슴을 울린 사연이다. 32세 창창한 나이의 조모씨가 600만원의 빚을 지고 직장을 그만두고 사라진 것은 지난 2004년 여름. 뒤늦게 아들의 소식을 접한 모친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내 손으로라도 다 갚아 아들이 다시 떳떳하게 살아가도록 하겠다”며 매달 20만원씩의 돈을 갚아왔다. 남편이 환갑을 넘겨 경제능력을 상실했고 본인 역시 장애 3급이지만 단 한 차례도 송금을 어긴 일이 없다. 이미 19차례 입금을 마쳤고 오는 12월에는 계를 부어 마련한 돈으로 나머지 빚을 모두 청산할 예정이다.

“이제 다음 달이 마지막 송금이 될 것”이라고 전화하며 눈물을 훔치는 이 모친의 말에 담당 추심원 역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56세의 박씨 아주머니는 붕어빵을 팔아 매일 2만원씩을 입금해 연체금 200만원을 모두 갚았다. 박씨가 빚을 지게 된 것은 노부모의 병원비 때문. 급한 김에 신용카드를 썼지만 목돈을 갚을 길이 막막했고 결국 금융채무불이행자로 전락했다. 나중에 사연을 접한 담당 추심원은 박씨의 빚을 갚으려는 의지를 높이 사 함께 빚을 갚을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김경정 추심원은 “매일 2만원 송금이라는 상환계획을 3개월 동안 한 차례도 어기지 않았다”며 “어쩔 수 없이 어긴 약속이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지켜내려는 박씨 아주머니 같은 분이 있어 우리 사회가 건강함을 잃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선호기자 shp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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